배우 이제훈에게 ‘사냥의 시간’은 특별했을 것이다. 10년 전이다. 무명의 독립 영화 감독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고등학교 시절을 추억했다. 영화 속 사연은 잔인하고 강렬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입어 본 교복이었다. 그때의 추억은 지금도 분명히 이제훈에게 배우로서의 가장 큰 동력이었다. 그 기억과 경험을 갖고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승승장구가 따랐다. 어느덧 이제훈은 충무로에서 가장 주목 받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뛰어난 30대 최고 흥행 보증수표가 되었다.
이제훈에게 10년 전 기억은 아주 즐겁고 행복했고 특별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독립영화계의 특별한 존재였던 윤성현 감독과 함께 했던 ‘파수꾼’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윤성현 감독과 다시 만났다. 그때 함께 했던 단짝 박정민도 합류했다. ‘기생충’으로 월드스타가 된 최우식, 그리고 영화계와 안방극장의 신드롬 주역 안재홍이 함께 한다. 강렬한 이미지의 박해수도 더해졌다. 이제훈은 ‘사냥의 시간’을 선택함에 있어 찰나의 고민도 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이제훈에겐 오랜만의 영화다. 물론 개봉까지 잡음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 관객들이 볼 수 있게 됐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촬영이 끝난 뒤 공개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더욱 남다르단다. 여러 작품의 러브콜이 있었겠지만 그는 ‘사냥의 시간’을 최우선으로 선택하고 집중했다. 사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의 영화적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윤성현 감독에 대한 무한 신뢰 때문이었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어떤 영화를 만들지 깊은 대화를 많이 나눴었죠. 사실 서로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아는 사이에요(웃음). 현장에서 윤 감독이 만족하지 못했다고 느낄 땐 제가 자청해서 테이크를 더 가기도 했어요. 뭘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찍고 싶은지 이미 서로 대화를 통해 다 알게 됐으니. 제가 현장에서 느낀 영화적 감정 조차 의심이 들 때 저에게 확신을 준 사람이 윤 감독이었으니.”
그가 영화에서 맡은 인물은 준석. 영화 시작과 함께 교도소에서 출소를 한다. 앞뒤 설명은 특별하게 없다. 다만 준석은 행복한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러나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은 암울한 디스토피아다.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이다. 그 안에서 준석은 자신만의 생존 방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생존을 위해 선택을 해야 했다. 이제훈이 바라본 지점이 바로 준석의 선택이었다.
“살아가면서 정말 많은 선택을 하잖아요. ‘사냥의 시간’도 제가 선택을 한 거고. ‘어떤 선택을 한 뒤 그 다음에 오는 결과에 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란 고민을 정말 많이 하며 살았어요. 그 질문을 이 영화가 하고 있다고 봤어요. 지금도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고요. 그 결과에 맞서 싸울까. 아니면 준석처럼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 속 선택은 감독이 만든 선택인데, 그럼 난? 이 영화가 정말 많은 걸 가르쳐 준 것 같아요.”
언뜻 닮은 듯 닮지 않은 이제훈과 ‘사냥의 시간’ 속 준석. 사실 준석은 윤성현 감독이 이제훈을 떠올리며 만든 인물이란다. 위험한 계획을 설계하는 주인공.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확신을 한 순간 정체 불명의 인물에게 쫓기는 위험. 불안하고 두려움을 간직한 얼굴. 특히나 완성되지 못한 청춘의 모습이기에 거칠고 또 낯설다. 이제훈으로선 오롯이 준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감독님이 ‘파수꾼’ 당시 기억의 떠올리신 것 같아요. ‘파수꾼’에서 부조리함에 대해 반항하는 모습이 되게 거칠게 나왔는데, 그 모습을 ‘사냥의 시간’ 준석에게 투영시킨 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그래서인지 저 스스로는 준석을 연기하면서 이질감은 거의 없었어요. 매번 작품을 하면서 ‘이번이 마지막이다’는 심정으로 매달렸는데 그런 모습을 감독님이 오롯이 ‘준석’에게 담아 내려 하신 것 같아요.”
‘사냥의 시간’ 자체는 워낙 어둡고 감정의 깊이도 깊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물 개개인이 느끼는 절망감이 크다. 하지만 어떤 영화나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모두는 그 어느 때보다 밝고 즐거웠단다. 연출을 맡은 윤성현 감독부터 주인공 이제훈 최우식 박정민 안재홍 모두가 또래 친구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이제훈이 대장 노릇을 하며 현장 분위기를 주도했단다.
“(웃음) 제가 그냥 역할 자체가 대장이라서. 하하하. 해수 형님부터 나머지 세 친구 모두가 너무 좋은 배우들이라 현장에서 더 없이 즐거웠어요. 각자 한 번은 꼭 해 보고 싶던 배우들이었죠. 정민이는 ‘파수꾼’에서도 함께 했었기에 익숙했죠. 안재홍은 ‘족구왕’을 본 뒤 ‘이 사람 뭐지?’ 싶을 정도로 기억에 많이 남았어요. 우식이도 ‘거인’을 본 뒤 ‘언젠간 꼭 한 번 같이 할 배우’라고 점 찍었던 적이 있었죠. 해수 형님은 스틸 만으로도 압도적이었어요.”
즐겁고 행복한 작업이었지만, 배우로선 정말 고통스런 작품이 ‘사냥의 시간’이기도 했다고. 촬영 기간도 워낙 길었다. 쫓기며 괴로워하는 연기는 실제로도 이제훈을 황폐하게 만들어 갔다. 즐거움의 한 편에선 이제훈 스스로가 어떤 거대한 벽에 부딪치는 느낌까지 받았단다. 체력적인 부분까지 자신을 몰아 붙이게 되면서 마지막에는 도망가고 싶었다고.
“글쎄요. 절 이렇게 힘들고 지치게 하고 바닥까지 끌어 내린 작품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어요. 영화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한’에게 쫓기면서 도망만 다니잖아요. 나중에는 너무 힘들고 괴롭더라고요. 이러다 내가 망가지겠구나 싶은 순간까지 있었으니. 그래서 촬영 끝나자 마자 실제로 미국으로 도망(여행)을 갔어요(웃음). 감독님이 추가 촬영하자고 하실까봐. 하하하. 두렵더라고요(웃음)”
그는 영화적 동반자라고 부르는 윤성현 감독과 다른 작품에서 또 다시 새로운 얼굴로 만나기를 희망한단다. 그의 영화적 세계관이 더욱 궁금해지고 있다고. ‘파수꾼’과 ‘사냥의 시간’, 두 작품이 떨어져 있는 10년이란 시간이 만들어 낸 차이만큼 앞으로 이어질 윤성현의 영화 세계가 너무도 궁금하다며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감독님의 영화 세계가 너무 궁금해지고 있어요. 그 깊이가 도대체 어디까지일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아요. ‘파수꾼’과 ‘사냥의 시간’ 단 두 작품으로는 감독님의 영화적 세계관을 설명하기엔 너무도 모자라죠. 감독님이 그리는 영화의 세계 속에서 뭐가 됐든 좀 더 있고 싶어요. 배우가 아니라도 좋아요. 잡일을 해도 좋습니다(웃음). 진짜 다음 작품에서도 안 불러주시면 섭섭할 것 같아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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