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or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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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출구조사를 보고 나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만에 그 생각은 깨졌습니다. 개표가 진행되면 될수록 최악이더군요. 선거결과는...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을 정도로 최악입니다.

 

보수는 개헌선만 지켰습니다. 민주당은 단독으로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하고, 모든 법안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180석 이상의 의석을 가져갔습니다. 문재인 정부를 강하게 비판해온 나로서는 이 선거 결과가 정말 쓰라립니다. 이런 시나리오만큼은 막길 바랐고, 거의 현실화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었으니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은 이렇습니다. 보수우파는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궤멸되었고, 문재인 정권은 레임덕 없이 임기를 마칠 것입니다. 보수는 대권주자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인물들이 전부 낙선했고, 차기 대권도 노리기 어렵습니다. 민주당은 정권을 재창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선거도 민주당이 이길 것입니다. 이걸 받아들이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선거의 패배 요인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많습니다. 먼저 공천 문제를 들 수 있겠지요. 공천 초반에 나는 김형오 공관위의 행보를 좋게 보았습니다. 현역 불출마를 매끄럽게 이끌어낼 때까지만 해도 뭔가 제대로 해보려는거 같았거든요. 문제는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 채워넣는 과정이 너무 이상했다는 겁니다. 각 지역구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인물을 공천해 이기는 공천을 했어야 하는건데... 경쟁력 있는 중진은 험지로 보내 죽게 하고, 그 자리엔 경쟁력 없는 신인을 꽂아넣고... 그렇게 전부 죽었습니다. 탈당과 무소속 출마가 줄을 이었고, 그들이 대거 살아돌아왔다는건 공천이 잘못되었다는걸 반증하는 것입니다.

 

코로나 19 역시 야당에게 엄청난 악재로 작용했습니다. 코로나 19는 선거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였고, 조국 대 윤석열, 경제실정과 같은 야당의 프레임을 전부 무력화시켰습니다. 뼈아픕니다. 만약 한달이나 두달 전에 선거가 치러졌다면 야당이 이렇게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두달전만 하더라도 윤석열과 추미애의 갈등이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고, 대통령 지지율은 지금보다 15% 가량 낮았지요. 그때 선거를 치렀다면 야당이 상당히 선전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이걸 따지는 것도 웃기는 노릇입니다.

 

선거 막판의 차명진 막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전체 유권자들의 절반은 선거를 대략 열흘에서 일주일 앞두고 어디에 투표할지 결정하는데, 지난 일주일 내내 차명진 막말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덮었습니다. 세월호 텐트 발언에, 당 지도부는 즉각 제명하라 했는데 윤리위에서 탈당 권유로 살려주고, 차명진은 면죄부를 받은거마냥 더 날뛰면서 2차로 현수막 드립까지 치고, 선거 전날엔 법원이 쐐기골까지 박아 줬지요. 나는 이것이 판세 전체를 바꿀 정도로 크진 않을 것이라 애써 생각하려 했지만, 현실은.... 수도권 각 지역구에서 최소 3% 이상의 표를 깎아먹었을 겁니다. 그 표가 고스란히 민주당으로 갔겠지요. 정말 뼈아프게도, 전국 각지에 근소한 격차로 아깝게 진 지역구들이 너무 많습니다. 서울 광진을, 서울 중성동을, 서울 강동갑, 경기 성남분당을, 경기 평택갑, 경기 안산단원을, 경기 남양주병, 경기 용인병, 경남 양산을, 부산 남구을.... 이렇게 5% 이내 격차로 진 지역구들은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지역들이었고, 반드시 가져왔었어야 하는 지역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본질적인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사실 공천은 민주당도 엉터리로 한 지역구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경기 광명갑이나 경기 의정부갑이요.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핸드볼 임오경, 소방관 오영환 공천이 잘된 공천인가요? 그런데 그들은 10% 이상 격차로 압승했습니다. 경기 고양정 이용우 토론 보셨습니까? 현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전혀 선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근데 지역구를 관리해 온 김현아를 꺾고 승리했습니다. 고민정, 이수진도 솔직히 깜이 됩니까? 근데 그런 지역구들에서도 민주당은 야권 거물을 꺾고 승리했습니다. 김남국, 김용민은 엉터리 공천 아닌가요? 황운하는요? 근데 전부 당선됐습니다. 타이밍과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막말은 민주당도 많이 했습니다.

 

선거의 승패 여부를 가른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받아들이기 고통스럽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이 냉혹한 현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가 교체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산업화를 이끌었던 607080 세대는 더 이상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닙니다. 박근혜 탄핵과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그들은 헤게모니를 잃었고, 표 결집력도 다소 약화되었습니다. 그 주류 자리를 대신한건 학생운동권 586세대와 그 영향을 받은 3040세대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주류 세대는 앞으로도 한참 당분간 이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고, 이들이 민주당에 대한 굳건한 지지를 놓지 않는 한 민주당은 인구 지형상 선거에서 패배하기 어렵습니다. 과거 한나라당이 영남 지역과 산업화 세대라는 강력한 지지층을 보유했듯이, 민주당은 수도권과 304050이라는 새로운 강력한 지지층을 콘크리트로 갖게 된 것입니다. (물론 50대 전체가 민주당을 지지한다는건 아닙니다. 50대의 절반은 보수, 나머지 절반 정도가 민주당에 표를 준 것으로 파악됩니다. 3040은 민주당에 거의 몰표를 던졌지요. 거기에 20대 여성 유권자까지 동맹으로 끌어들여 힘을 합쳤습니다.)

 

이 기울어진 인구비율은 선거 판세를 초토화시켰습니다. 특히 수도권과 충청도에서요. 이번 선거는 투표율이 높았습니다. 보수도, 진보도, 둘다 결집했지요. 그런데 보수가 졌습니다. 이렇게 결집해서 선거를 치렀는데도 패배했을 때의 좌절감과 실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2012년 민주당 지지층이 대선에서 패배하고 나서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들은 한동안 크나큰 정신적 방황을 겪어야 했지요. 이번 선거를 겪고 난 보수의 좌절감은 더 클 것입니다. 607080 세대는 앞으로 숫자가 줄어들 일만 남았으니까요. 반문성향의 20대 남성들은 외롭게 한쪽 구석에 고립되었습니다. 이 추세가 지속된다면 영남 지역의 핑크색은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더 옅어져 갈 것이고, 수도권의 파란 물결은 더 진해질 것입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 세력이 교체되면서 기존의 정치 문법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큰 선거에서 한 정당이 4연승하지 않는다"는 정치권의 징크스도 깨졌습니다. 민주당은 이제 5연승, 6연승, 7연승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유권자들은 견제와 균형을 중요시한다"는 진리와도 같았던 명제도 깨졌습니다. 민주당에 표를 주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보수우파라는 집단을 깨끗이 소멸시키고 아예 없애 버려야 할 존재들로 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견제와 균형을 바랄리 없지요. "지역구 관리를 잘하는 의원들은 웬만하면 당선된다"는 이야기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지역구 관리를 꾸준히 잘 해온 통합당 의원들조차도 민주당의 낙하산들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나가떨어졌습니다. "정권 후반기에 치러지는 선거에서 여당이 이기긴 어렵다"는 명제도 깨졌습니다. 문재인은 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쥔 대통령으로 퇴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민주화 이후 처음 있는 현상이며, 엄청난 지각변동이 우리 발 밑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탄핵의 여파는 생각보다 깊고 컸습니다. 보수진영 내부에서는 대충 그 갈등과 상처를 봉합하고 지나가려 했지만, 이 나라의 중도에 있는 유권자들은 아직도 보수정당에게 탄핵 프레임을 덧씌워서 바라봤습니다. 탄핵된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 황교안이 당대표를 맡았던 시점부터 어느 정도 감수하고 들어가긴 했으나, 이 정도로 원사이드한 결과가 나올 줄은 저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여러가지 경제, 외교, 안보, 사회 정책들의 실패조차도 탄핵의 충격파를 뛰어넘지 못했고, 조국 사태도 거의 영향이 없었습니다.

 

투표는 생각보다 감정적인 행위입니다. 돌아가는 정세를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공약들을 세심히 지켜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투표장에 나가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유권자들의 다수는 좀 더 세련되어 보이고, 좀 더 이미지가 괜찮아 보이는 쪽으로 표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수우파는 지난 세월 동안 이런 노력들을 게을리했습니다. 당 전체가 길거리에서 태극기를 들고 투쟁할 때부터 어쩌면 패배는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차명진은 거기에 쐐기를 박았을 뿐이지요. 앞으로 보수우파가 살아나려면 이 나라의 젊은 세대들이 보수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적인 거부감을 해소해야 하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걸 해내지 못하면 도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소비자가 사고 싶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 물건은 팔리지 않습니다.

 

보수가 과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모멘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선을 바라보면 최소한의 구심점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대권주자들이 전부 나가리된 마당에 당이 쪼개지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2년 동안 문재인 정부의 실책과 폭정 덕분에 보수가 생각보다 빠르게 탄핵의 충격에서부터 회복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해 재건을 잘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제의 선거 결과는 지난 2년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모든걸 다시 원위치로 돌려놨습니다.

 

김병준 비대위가 해왔던 쇄신의 노력들, 황교안이 장외투쟁하면서 끌어모았던 아스팔트 보수들, 조국 사태로 정부여당에 등을 돌리고 야권에 조금이나마 기대를 가졌던 젊은이들, 통합을 하면서 모았던 영입인재들, 전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걸릴지 모르겠습니다. 5년, 10년... 어쩌면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요.

 

저는 이 글을 마지막으로 블로그를 접으려고 합니다. 2018년에 블로그 운영을 시작할 때부터 2020년 총선까지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달려왔습니다. 만약 선거에서 이기면 그걸로 저의 소임은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기분좋게 마무리하려 했었습니다만, 정반대의 결과가 나와버려서 참 안타깝습니다.

 

개인적으로 당분간은 현생에 좀 더 집중할 생각입니다. 정치평론가도 아니고 정치인 지망생도 아닌 제가 본업을 제쳐두고 블로그에 온전히 시간을 쏟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지난 몇달간 정치 뉴스를 너무 많이 보고, 정치 글을 쓰다 보니 삶이 피폐해진거 같기도 하고요. 이제는 관심을 좀 덜 가지면서 머리를 식혀야겠습니다.

 

여태껏 제 블로그에 방문해서 글을 읽어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댓글까지 달아주시면서 의견을 공유하고 토론에 참여해주신 분들께는 더욱 더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막판에 선거 예측이랍시고 이것저것 해봤는데.... 완전히 틀렸네요. 행복회로를 너무 풀로 가동했나 봅니다.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려야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잠시 정치에서 벗어나 머리를 식히길 바랍니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졌고, 빠른 시일내에 많은 것이 바뀌진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길게 보고 가셔야 합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며, 버텨냅시다. 너무 많은 감정을 쏟지 않되, 항상 예의주시하고 눈을 뜨고 있어야 합니다.

이 밤은 길고 어두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윈브라이트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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